지난해 11월18일 이재철(70) 목사는 퇴임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100주년기념교회의 교인 수는 1만3000명이었다. 허울뿐인 명목 교인 수가 아니라 실질적인 출석 교인 수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13년4개월 동안 담임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에게 그는 “나를 철저하게 버려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교회를 책임질 ‘4인 공동 담임목사들’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퇴임 설교가 끝나고 이 목사는 교인들과 작별했다. 큰 교회를 일군 담임목사들이 퇴임식 때 관행적으로 받는 수억 내지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전별금도 없었다.

이재철 목사의 거창 집에는 담벼락이 없다. 대신 널따란 뜰을 마련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한 공간이다. 송봉근 기자
이재철 목사는 “한반도 어느 곳이든 평당 10만 원짜리 땅이 나오는 곳을 생의 마지막 정착지로 삼아서 보내겠다. 굳이 ‘평당 10만 원’이라고 특정한 이유는 그 정도 가격이라야 저희 부부 형편에 맞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조촐한 퇴임식을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이 목사를 배웅하며 교인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그가 걸어왔고, 또 걸어갈 걸음걸이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드물고도 귀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목사는 지인들과 작별 인사를 마치고 서울을 떠났다. 차를 타고 경상도 김천의 산중턱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30분이었다. 이 목사 부부는 김천시 웅양면의 해발 560m 산동네에 ‘평당 10만 원짜리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컨테이너 2개 동을 갖다 놓고 살 참이었다.

암투병 중인 이재철 목사를 위해 교인(지음재 아키텍츠 이재성 대표)이 설계한 집은 '동굴 수도원'을 본딴 것이라고 한다. 돌로 된 집에, 입구도 동굴처럼 옆으로 나 있다. 송봉근 기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교회 교우 중에 건축설계사가 있었다. 그가 “제 아내도 투병 중이다. 암 투병 중인 목사님이 산골의 추운 집에서 살면 어떡하느냐”며 외풍이 없는 집을 설계해 주었다. 이재철 목사는 2013년 암 수술을 한 뒤 방사선 치료를 31차례 받은 바 있다. 집의 시공 비용은 물론 이 목사 부부가 댔다.
지난해부터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이재철 목사는 몇 번이나 거절했다. “나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일 뿐”이라며 조용한 마무리를 다짐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가 길어 올리는 ‘영성의 울림’이 우리의 아픔을 적시고, 우리의 목마름을 적시고, 우리의 삶을 적셔주기 때문이었다. ‘삼고초려’를 거듭한 끝에 결국 거창의 산골로 내려갔다.
15일 김천구미역에서 1시간 가까이 차를 달렸다. 진눈깨비가 내렸다. 굽이굽이 산골짜기였다. 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어귀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40가구가 사는 이곳에서 이 목사 부부는 ‘마을 주민’으로 살고 있었다. 마을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동네 주민들과 왕래하며 생활했다. 이 목사의 집에는 담벼락도 없었다. “마을 사람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재철 목사에게 뒤늦게 물었다. 왜 자신을 거침없이 버리라고 했는지.

이재철 목사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건 겸손과 교만의 갈림길이다. 산골의 이 거대한 자연이 저를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이 목사에게 이런 식의 ‘자기 버림’은 처음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정신여고에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출석 교인 3200명의 묵직한 교회로 키운 뒤에도 “딱 10년만 하겠다”는 첫 약속을 지키고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았다. 스위스 제네바의 한인교회에 가서도 그랬다. 3년에 걸쳐 미자립 교회를 자립 교회로 탈바꿈시킨 뒤에 이 목사는 거침없이 교회를 떠났다. 자기 버림의 뿌리를 묻자 이 목사는 책장에서 성경을 꺼냈다. 요한복음 16장7절이었다.

이재철 목사의 자택에 놓여 있던 십자가. 서울 양화진에서 전지 작업할 때 떨어진 나무로 만든 십자가다. 송봉근 기자

1998년 주님의교회 10년 목회를 마치고 스위스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이재철 목사와 정애주 사모의 사진이 거실 책장에 놓여 있었다. 송봉근 기자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해사(성령)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산골에 마련한 이재철 목사의 집은 책장이 방과 거실 사이의 벽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을 맡을 때도 자신의 월급을 교인들에게 매달 공개했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월급 차이도 불과 10여 만원 수준이었다. 송봉근 기자
이 말끝에 이 목사는 “1류 도공과 3류 도공의 차이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기독교계에서 내실 있는 출판으로 유명한 홍성사 대표를 맡고 있는 정애주 사모는 이재철 목사의 아내이자 신앙의 길벗이다. 송봉근 기자
이 목사는 산골에 내려와서 쓴 자작시를 한 편 보여주었다. 제목이 ‘바람’이었다. 그 시는 거창의 산골에서 산과 나무와 대숲 소리로 자신을 관통하며 쉼 없이 불어대는 ‘하나님의 숨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목사는 “내가 100주년기념교회 목회를 안 했거나, 은퇴 후에 합정동 살던 집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하늘과 땅을 되찾는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삶이 ‘모래시계’라고 했다.

구상 시인이 이재철 목사에게 선물했던 십자가. 이 목사는 "이사할 때 예수님의 팔이 부러졌다. 그런데 붙이지 않고 일부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2차 대전 때 폭격 받은 독일 성당에 예수님의 한쪽 팔이 부러진 십자가 상이 있었다. 그 아래 팻말에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팔을 필요로 하십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걸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책장에 놓여 있던 태극 문양의 부채. 이해인 수녀가 이재철 목사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송봉근 기자
인터뷰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 이재철 목사의 자작시 '바람'을 꺼내 읽었다. 거기에는 '거침 없이 버려본' 이가 노래하는 버림 이후의 영성이 오롯이 흘렀다. 그것은 바람보다 거세고 , 바람보다 깊고, 바람보다 고요한, 그런 바람이었다.

이재철 목사는 "버려야 얻는다.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에만 산골에는 비와 진눈깨비, 그리고 우박이 번갈아가며 내렸다. 송봉근 기자
거창 산골에서 쓴 이재철 목사의 자작시
바람
이재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하고,
로트레아몽은
좌절과 절망을 노래했지
하지만 나는,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바람이 분다
그래서 오늘도 산다
바람,
내
생명의 근원
지혜의 숨결
(2019년 1월 11일)
[출처: 중앙일보] 퇴임 후 산골로 간 이재철 목사 "거침 없이 나를 버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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