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처럼 진실하고 정직하며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네가 나를 자극하여 아무 이유 없이 그를 해치게 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히브리서 11:37-39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 . .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8:34).
예수님은 만약 사람들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부르면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25),
이는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욕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저주하고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5:20).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바울에 대하여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길,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사도행전 9:16)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난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설계에 따라 주어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설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빌립보서 2:30에 의하면,
여기서 "남은 것을.... 채우노라"라는 표현의 의미는 이미 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합당한 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그들의 사랑이 담겨 있는 물질을 바울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24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전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받은 많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현하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를 따른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고난을 세상이 목도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을 보게 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쨋든 하나님은 그것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11:27-38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이 이러한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이 기독교인의 이 고난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과분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주십니다.
어떻게 이 고난받는 성도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까?
성도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39절).
즉,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고난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난의 가치는 정확히 그들의 믿음 안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을 고난에서 건져 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히브리서 11:27-35).
어떤 때는 고난을 다 겪게 하시되 참고 인내해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히브리서 11:35-39).
고난에서 건짐받는 믿음과 고난을 인내하는 믿음, 이 두 믿음의 공통 분모는 둘 다 모두 신체의 자유나 육체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건짐받은 신자는 "내가 얻은 자유나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죽임을 당하는 자는 "내가 잃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내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신뢰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특별히 고난받는 선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세상을 향한 선물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난 중에도 믿음을 유지하고 견디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세상에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즉,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나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내 보여 줍니다.
얼마나 생생한 십자가의 선포입니까!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안겨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세상은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이 선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세상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우리는 그러한 선물을 세상에 안겨 줍니다.
세상이 드디어 고난의 쓰디쓴 선물을 받는 시점이 도래하였을 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감으로써 그때를 대비하십시오.
안식일 전 날(막15:42)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죽으셨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몸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작업이 완성된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창2:3).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새 창조의 작업을 완성하신 구속 주간의 일곱 번째 날에 무덤에서 안식하셨습니다.
요셉은 존경 받는 공회 회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막15:43).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인 것을 숨겨왔습니다(요19:38).
하지만 요셉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공회 회원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눅23:51).
예수님이 처형되었을 때 그는 ‘당돌히’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막15:43).
같은 공회 회원이었고 일찍이 예수님께 찾아 왔던 니고데모(요19:39)와 함께 예수님을 자기 새 무덤에 넣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자신들의 입장을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마26:7)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안식은 ‘바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자기 사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나의 사명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안식입니다.
예수님처럼 요셉과 니고데모 그리고 한 여인처럼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며 안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 팔리신(마26:2) 이후 수동이 되셨습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우실 때에도 자기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으셨습니다(사53:7).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신뢰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쌓였습니다(사50:4).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과 기도의 사투를 벌이십니다.
일비일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항변하고 저항하고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십시오.
자기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길 기도하고 대적들을 선대하고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배반
마 26 : 2, 14-16, 24-25, 30-35, 48-50, 56절 / 350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자기 탐욕과 악에 빠졌기 때문이다(요17:15).
마귀가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을 때(요13:2)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돈을 좋아했고 도둑이었기 때문입니다(요12:6).
마귀가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요13:27)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마귀가 지배했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적당한 기회를 찾았습니다(막14:11).
기회가 왔을 때 무리를 이탈했고(요13:29), 예수님을 체포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행1:16).
그들과 함께 짠 군호대로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였을 때(눅22:31) 베드로는 악에 빠졌고(막14:38)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고(요17:15), 제자들에게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6:13).
자신의 탐욕을 경계하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찬 예식을 통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명령하셨고, 세족 예식을 통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요13:14)”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예수님이 성찬과 세족 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 사함’(마26:28) 곧 ‘용서’였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의 발을 씻으십니다.
성찬과 세족 예식을 통해 끊임없는 용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잡아 죽일 흉계를 꾸미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이야기(3-5절)와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 이야기(14-16절) 사이에 무명의 한 여자의 이야기를 넣어두었습니다(6-13절).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낭비라는 부정적 시선 속에서도 아름다운 행동을 했습니다.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말하는 꾸지람을 무시하시고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동을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예수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행동한 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향유는 노동자의 연간 소득에 해당될 만큼 값비쌌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행동은 죽음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위대함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이 행한 일은 복음 선포와 더불어 기록된 것입니다.
이 여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우리의 소중한 것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소중한 것을 허비하며 예수님께 의미를 두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화가 임할 것입니다(마23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며 세상의 멸망과 예수님의 재림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다시 오셔서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모든 불신자들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곳에 던지시고, 끝까지 견딘 그리스도인은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짜 그리스도인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에 속지 않도록 성경의 진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신앙의 박해를 끝까지 견디고 모든 민족에게 천국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자연과 세상의 징조들을 보며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성경적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눅21:34-36).
충성되고 지혜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직무에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 되시는 교회에 헌신하며 고난당하는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하고 격려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1:20-21)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출처인 신명기 6장 4-5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신6:5-21).
또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출처인 레위기 19장 18절은 성결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역시 거룩해야 하며(레19:2),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결국 둘째 되는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성결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을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리십니다(신6:2-3,15).
십계명은 성경 최고의 계명과 성결계명으로 축약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참된 성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성결한 사람입니다.
시대의 선지자를 믿고 따르기
마태복음 21장 18 ~ 22장 14절 /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예수님은 길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말리심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지위를 박탈하셨습니다(마21:18-22).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들을 믿지 않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최후로 보내신 구원자 곧 하나님의 아들 조차 그들은 존대하지 않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으로 규정하셨습니다(마23:31).
그들의 만행을 규탄하셨으며 그들의 파멸을 선고하셨습니다(마23:29-37).
그들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로 소개된 “세리들”과 “창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 세례 요한과 같은 시대의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과 ‘구원자’로 존대하고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외침을 기록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기 시대의 선지자를 존대해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고 그들이 선포하는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며,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권력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허용한 성전 제사용 짐승을 판매하고 환전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성전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교 권력자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민”(막11:17)이 아닌 ‘제한된 사람들만’ 기도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에서 자기에게 나아 온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유대교 권력자들과 백성의 부조리와 부패와 실패에 대한 무력 시위였고 그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동은 만민이 기도하는 새로운 성전 시대에 대한 예언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들과 저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구원하소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여!’하고 예수님을 찬미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부패와 실패 앞에 분노하지 말고 갱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심판과 치유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셨던 것처럼 진리 가운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서서 살아갑시다.
용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유일하신 아들을 세상에 죄의 용서를 위한 제물로 바치셨습니다(요3:16, 사53:6).
용서는 최상의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위한 희생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심기고, 자기 목숨을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속물로 주려 오셨습니다(막10:45).
용서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목 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셨습니다(눅23:34).
제자들에게는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6:12) 용서를 받기를 원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14-15).
용서는 폐의 호흡과 같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듯이 우리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용서가 결코 제한이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몇 번을 용서 했는지 세어보지 말고 용서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가 몇 번을 용서했는지 세고 있다면 단지 복수를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제한 없는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결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집인 교회는 성결해야 합니다(고전3:16).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결은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사람을 교회에서 권력과 지위를 다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18:1).
자신의 권력욕에 취해서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고(마18:10) 그들을 실족시키는 사람들 곧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만드는 혹은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사람을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고전3:1-4).
교회에서의 모든 권력다툼은 중지되어야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도 중단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먼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마7:1-6).
또한 개인적인 권고와 교회의 권고를 통해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일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만약 교회의 권고마저 무시한다면 그를 교회에서 내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고 낮추십시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환영하고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사람을 사랑과 지혜와 인내로 권고하십시오.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 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그 왕권을 가져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16:28).
예수님의 산상변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묘한 병행과 대조를 동시에 이룹니다(마27:35-54).
이 산에서 예수님을 영광을 받으시고,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 예수님은 수치를 당하십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빛나지만,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 예수님의 옷은 벗겨지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의 양 옆에는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 모세와 엘리야가 있지만,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 예수님의 양 옆에는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까지 하나님께 반항했는지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강도가 있습니다.
이 산에서는 밝은 구름이 현장을 드리우지만,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는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이 산에서는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다고 엉겁결에 내뱉지만,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 수치심에 숨습니다.
이 산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서는 이방인 병사가 놀라며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신상변모는 고난당하는 교회의 청지기들을 위로합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고 그 때에 교회의 청지기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교회의 청지기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실 자신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라는 말씀으로 교회가 받을 공격과 교회가 얻을 승리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여, 내 교회는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교회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은 이제는 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나를 사망에 가두어 둘 수 없고 나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여, 사탄과 그의 수하에 있는 귀신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는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최종 병기 삼아 내 교회를 지배하고 가두고 침묵하게 만들 수 없다.
그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고 또한 전진할 것이며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의 청지기들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았고 심지어 순교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시대의 교회와 곧 교회의 청지기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읽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마16:24).
그렇지만 반드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입니다(마16:27).
그 때에 예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아 예수님의 아내의 자격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상을 받겠지만 교회의 대적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연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승리할 것을 믿고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특별히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청지기가 되어 교회를 위한 희생과 고난을 기꺼이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정체를 베드로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신 것을 알게 되었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속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16:18-19).” 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여, 그대의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인즉 그대의 본분은 반석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를 처음으로 안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 곧 교회를 세우는 건물에 처음 놓인 돌이다.
베드로여, 장차 그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다 함께 들어오게 될 천국의 문을 열어 주는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지혜로운 관리자가 되고 안내자가 되어 이제 자라나기 시작하는 어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명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여, 그대는 중요하고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그대는 전체 교회의 번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내리는 결정은 대단히 중요하여서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힘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과 예언대로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과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복음의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 교회의 초석과 복음의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벧전2:4-8).
특별히 우리가 소속된 교회에서 주춧돌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청지기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말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베드로의 문제는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심하다’는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입니다.
그렇다면 ‘믿다’는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을 갖고 있다’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곧 믿음이 컸을 때, 베드로는 바람불고 물결치는 바다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나누어졌을 때, 곧 믿음이 작아졌을 때, 베드로는 바다 속으로 빠져갔습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 제자 됨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큰 믿음의 때에는 ‘물 위로 걷는 것’과 같은 예수님의 ‘전권’에 참여하고, 작은 믿음의 때에는 ‘물속으로 빠져 가는 것’과 같은 ‘고난’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제자의 의무 수행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고난’이 아니고 ‘작은 믿음’ 곧 ‘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께서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닥친 고난으로 인해 믿음이 작아질 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응시하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질러야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가 고난당하는 것을 분명히 보시고 그들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자기 제자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고난에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이 해 저문 시간에 “푸른 잔디”(막6:39)로 덮인 “빈들”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유월절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오후 해질 무렵(출12:6)부터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지만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의 모든 처음 난 것은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빈들에서 무리를 먹이신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선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마14:19)” 예수님은 그 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죄와 죄의 심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벧전1:19)이시고 “생명의 떡”(요6:35)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예수님 재림의 날까지 전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의 병과 장애와 죽음과 가난과 마귀를 통치하셨고, 그 모든 악에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모든 악의 근원인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 죄의 벌을 대신 받으셨으며 마침내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님의 왕적 통치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무력으로 인간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죄의 세력,
인간의 몸과 마음의 연약함과 병과 죽음,
마귀와 귀신들의 권세와 폭력을 통치하시고,
인간을 그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이 천국의 비밀입니다(롬16:25-26).
하나님은 이 세상 만민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이 세상 만민을 위한 제물로 바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 만민의 죄를 담당하셨고 이 세상 만민이 받아야 할 죄의 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롬5:8).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행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하나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자기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 곧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아는 것을 허락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와 죄의 세력, 몸과 마음의 연약함과 병, 마귀와 귀신들, 이 모든 악에서 비롯된 삶의 불의와 부조리와 악에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한 백성
마태복음 11장 16~19, 25~30절, /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8:1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출생지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친구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마음 닫힌 옹고집 아이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멸망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시면서 세상 모든 개인을 하나님 나라의 새 자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초청을 수락한 사람들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새 자손 곧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마16:18).
교회는 하나님이 새롭게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새 백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본 백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큼 교회가 세워지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롬11:25).
그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본 백성과 새 백성이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엡2:18).
그때까지 교회는 마음 닫힌 옹고집 아이같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초청과 당부를 수락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다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과연 “오실 그 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신지 여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는 농부나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농부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마3:10,12).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과 어울리셨고 그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그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머9:36).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꺼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그리스도 약속들과 관련된 낱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이 성경이 예언한 “오실 그 이” 곧 그리스도이신 것을 설명하셨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오해 때문에, 예수님을 위한 고난 때문에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알고,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욥의 인내와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약5:7).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내팽개쳐져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싸매 주셨고,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겔34:4,16).
예수님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돌볼 더 많은 목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서 모든 종족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종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마28:18-20).
그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인들은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능력 있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행1:8).
성령 안에서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성찬을 나누고,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고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성령의 권능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천국 윤리를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은 지속적인 태도와 행동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일회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속적인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은 환자의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환자의 믿음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인들(마8:5-13,9:1-8),
친구들(마8:14-15),
친척들,
부모(마9:18-26)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를 치료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일방적인 사랑으로 환자를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 치료에 있어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 절하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병 낫기를 간절히 끈질기게 간청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공적인 장소에서 말과 행동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간청합니다.
어떤 장애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고 상황이 악화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치유를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그러므로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더 많이 기도할수록 더 많이 치료받고 치료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탄의 수하에 있는 귀신들이 나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완전히 부릴 수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귀신들은 더럽고 나쁜 도둑입니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더럽히고 약탈하고 파괴하고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요10:10).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게 할 수 있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간질로 심히 고생하게 하고 자주 물과 불에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듣거나 보거나 말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릴 만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할 수 있고, 자해와 자살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격을 매우 사납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해코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 달려와 예수님을 위협했고, 예수님께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정체를 아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고 사람들 속에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지만,
예수님은 구신들을 알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권세와 권능을 주셨고, 그리스도인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기도의 사림이 되어야합니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대적하고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 곧 신앙의 동료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티와 들보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을 비판하기 전에 신앙의 동료를 거울삼아 자신을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의 눈 속에 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본 것은 형제의 티가 아니라 자신의 들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비판은 “거룩한 것” 혹은 “진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동료를 비판하는 것은 그에게 거룩한 것을 혹은 진주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누군가에는 최고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할 때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비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혹은 비판을 자신에 대한 최선의 배려와 사랑과 선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우리의 비판을 발로 밟고 돌이켜 우리를 찢어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부족함과 실수와 죄가 보이면 형제를 거울삼아 먼저 자신을 살핍시다.
형제의 비판을 고마움으로 수용하고 뉘우칩시다.
실수나 죄를 저지른 형제를 찾아가 겸손과 사랑으로 권고하고 그가 뉘우치면 용서합시다. 마태복음18장 15절에 의하면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이재철을 거침없이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원하신다면 이재철을 버리시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지난해 11월18일 이재철(70) 목사는 퇴임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100주년기념교회의 교인 수는 1만3000명이었다. 허울뿐인 명목 교인 수가 아니라 실질적인 출석 교인 수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13년4개월 동안 담임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에게 그는 “나를 철저하게 버려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교회를 책임질 ‘4인 공동 담임목사들’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퇴임 설교가 끝나고 이 목사는 교인들과 작별했다. 큰 교회를 일군 담임목사들이 퇴임식 때 관행적으로 받는 수억 내지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전별금도 없었다.
이재철 목사의 거창 집에는 담벼락이 없다. 대신 널따란 뜰을 마련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한 공간이다. 송봉근 기자
이재철 목사는 “한반도 어느 곳이든 평당 10만 원짜리 땅이 나오는 곳을 생의 마지막 정착지로 삼아서 보내겠다. 굳이 ‘평당 10만 원’이라고 특정한 이유는 그 정도 가격이라야 저희 부부 형편에 맞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조촐한 퇴임식을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이 목사를 배웅하며 교인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그가 걸어왔고, 또 걸어갈 걸음걸이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드물고도 귀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목사는 지인들과 작별 인사를 마치고 서울을 떠났다. 차를 타고 경상도 김천의 산중턱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30분이었다. 이 목사 부부는 김천시 웅양면의 해발 560m 산동네에 ‘평당 10만 원짜리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컨테이너 2개 동을 갖다 놓고 살 참이었다.
암투병 중인 이재철 목사를 위해 교인(지음재 아키텍츠 이재성 대표)이 설계한 집은 '동굴 수도원'을 본딴 것이라고 한다. 돌로 된 집에, 입구도 동굴처럼 옆으로 나 있다. 송봉근 기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교회 교우 중에 건축설계사가 있었다. 그가 “제 아내도 투병 중이다. 암 투병 중인 목사님이 산골의 추운 집에서 살면 어떡하느냐”며 외풍이 없는 집을 설계해 주었다. 이재철 목사는 2013년 암 수술을 한 뒤 방사선 치료를 31차례 받은 바 있다. 집의 시공 비용은 물론 이 목사 부부가 댔다. 지난해부터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이재철 목사는 몇 번이나 거절했다. “나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일 뿐”이라며 조용한 마무리를 다짐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가 길어 올리는 ‘영성의 울림’이 우리의 아픔을 적시고, 우리의 목마름을 적시고, 우리의 삶을 적셔주기 때문이었다. ‘삼고초려’를 거듭한 끝에 결국 거창의 산골로 내려갔다. 15일 김천구미역에서 1시간 가까이 차를 달렸다. 진눈깨비가 내렸다. 굽이굽이 산골짜기였다. 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어귀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40가구가 사는 이곳에서 이 목사 부부는 ‘마을 주민’으로 살고 있었다. 마을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동네 주민들과 왕래하며 생활했다. 이 목사의 집에는 담벼락도 없었다. “마을 사람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재철 목사에게 뒤늦게 물었다. 왜 자신을 거침없이 버리라고 했는지.
이재철 목사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건 겸손과 교만의 갈림길이다. 산골의 이 거대한 자연이 저를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질의 :퇴임 설교에서 왜 “이재철을 거침없이 버리라”고 했나.
응답 :“교회를 개척한 담임목사가 거침없이 떠나가는 ‘자기 버림’이 없으면 어찌 되겠나. 결국 걸림돌이 된다. 일평생 자신이 헌신하고 섬기던 교회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자신이 섬기던 교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나.”
이 목사에게 이런 식의 ‘자기 버림’은 처음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정신여고에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출석 교인 3200명의 묵직한 교회로 키운 뒤에도 “딱 10년만 하겠다”는 첫 약속을 지키고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았다. 스위스 제네바의 한인교회에 가서도 그랬다. 3년에 걸쳐 미자립 교회를 자립 교회로 탈바꿈시킨 뒤에 이 목사는 거침없이 교회를 떠났다. 자기 버림의 뿌리를 묻자 이 목사는 책장에서 성경을 꺼냈다. 요한복음 16장7절이었다.
이재철 목사의 자택에 놓여 있던 십자가. 서울 양화진에서 전지 작업할 때 떨어진 나무로 만든 십자가다. 송봉근 기자
1998년 주님의교회 10년 목회를 마치고 스위스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이재철 목사와 정애주 사모의 사진이 거실 책장에 놓여 있었다. 송봉근 기자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해사(성령)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질의 :무슨 뜻인가.
응답 :“예수님께서도 떠나셨다.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하셨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예수님이 떠나가야 비로소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보았다. 하물며 담임목사가 퇴임 후에도 교회에 머물면 어찌 되겠나. ‘원로목사’라는 이름으로 계속 머물면 그 교인들에게 유익하겠나, 아니면 불이익을 주겠나. 답은 명약관화하다. 퇴임하면 거침없이 떠나야 한다.”
질의 :그런 사례가 많지는 않다. 교회가 클수록 원로목사로 남아서 ‘상왕(上王) 노릇을 하거나, 심지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기도 한다. 왜 그런가.
응답 :“‘진정한 버림’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버려야 하나. 버려야만 우리가 얻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게 ‘전부’다. 시간이 지나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나 버려본 사람은 안다. 버리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것을 갖게 된다. 그래서 버려본 사람이 또 버리게 된다.”
산골에 마련한 이재철 목사의 집은 책장이 방과 거실 사이의 벽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을 맡을 때도 자신의 월급을 교인들에게 매달 공개했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월급 차이도 불과 10여 만원 수준이었다. 송봉근 기자
이 말끝에 이 목사는 “1류 도공과 3류 도공의 차이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의 :그 차이가 뭔가.
응답 :“둘 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서 가마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1류 도공과 3류 도공은 버리는 개수에서 차이가 난다. 1류 도공은 정말 뛰어난 걸 얻기 위해 끊임없이 버린 사람이다. 사람들은 빼어난 작품 한 점만 본다. 그러나 그 작품 뒤에는 수많은 깨어짐의 과정, 수많은 버림의 과정이 있었던 거다.”
질의 :사람들은 ‘버림’을 힘들어한다. 왜 그런가.
응답 :“그게 다가 아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걸 일종의 ‘종잣돈’이라 생각한다. 그걸 잃으면 모두 잃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막상 버려보면 알게 된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버려야만 새로운 경지로 갈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도 도공의 그릇과 똑같다.”
기독교계에서 내실 있는 출판으로 유명한 홍성사 대표를 맡고 있는 정애주 사모는 이재철 목사의 아내이자 신앙의 길벗이다. 송봉근 기자
질의 :서울을 버리고 거창에 왔다. 도시를 버리고 산골에 왔다. 무엇이 열렸나.
응답 :“대나무숲의 파도 소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친다. 아내와 나는 그걸 ‘죽림(竹林) 파도’라고 부른다. 밤에 들어도 좋고, 새벽에 들어도 좋고, 낮에 들어도 좋다. 이곳에 와서 내게 새롭게 열린 건 하늘과 땅이다. 한편으론 감사하고, 한편으론 경이롭다. 박목월 시인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노래했다. 예전부터 그 시를 참 좋아했다. 도시에 살면서 밤하늘에 불현듯 구름과 달이 보이면 ‘저걸 보고 그렇게 표현하셨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에 오니까 알겠더라. 해발 560m 산골이다. 구름이 우리집 지붕 위로 간다. 이곳에 세찬 바람이 불면 구름이 달려간다. 그때 구름 대신 달을 보면, 달이 뛰어간다. 아, 그래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구나. 이곳에 온 지 넉 달이 안됐는데, 구름에 달이 달려가는 걸 숱하게 봤다.”
이 목사는 산골에 내려와서 쓴 자작시를 한 편 보여주었다. 제목이 ‘바람’이었다. 그 시는 거창의 산골에서 산과 나무와 대숲 소리로 자신을 관통하며 쉼 없이 불어대는 ‘하나님의 숨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목사는 “내가 100주년기념교회 목회를 안 했거나, 은퇴 후에 합정동 살던 집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하늘과 땅을 되찾는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삶이 ‘모래시계’라고 했다.
구상 시인이 이재철 목사에게 선물했던 십자가. 이 목사는 "이사할 때 예수님의 팔이 부러졌다. 그런데 붙이지 않고 일부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2차 대전 때 폭격 받은 독일 성당에 예수님의 한쪽 팔이 부러진 십자가 상이 있었다. 그 아래 팻말에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팔을 필요로 하십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걸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책장에 놓여 있던 태극 문양의 부채. 이해인 수녀가 이재철 목사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송봉근 기자
질의 :인생이 왜 ‘모래시계’인가.
응답 :“아날로그 시계는 초침과 분침, 시침이 동일한 시계판 위를 무한반복한다. 디지털 시계는 0부터 59까지 숫자가 무한반복된다. 그 속에서는 나의 지나간 날이 안 보인다. 내 나이와 상관없이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래시계는 다르다.”
질의 :어떻게 다른가.
응답 :“생김새부터 다르다. 삼각형 모양의 두 유리병이 역방향으로 맞물려 있다. 나는 1949년 4월에 태어났다. 한국 나이로 71세, 날수로 따지면 69년11개월을 살았다. 내 눈에는 보인다. 내 유리병에 69년11개월은 텅 비어 있다. 유리병의 윗부분에 남아 있는 모래의 양보다 빈 공간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내일 아침, 블라인드를 올려서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감격할 것이다. 내 모래시계의 윗부분에 또 하루의 모래가 남아 있구나. 시편 8편은 다윗이 쓴 시다. 다윗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찬 아름다움과 주의 영광을 노래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생각하시며’라고 묵상했다. 나는 ‘재철이가 무엇이기에 재철이를 생각하시며’라고 묵상한다. 그러니 바람이 분다고 문제겠나. 비가 내린다고 문제가 되겠나. 이 거대한 자연이 내게 삶에 대한 겸손과 삶에 대한 감격을 일깨워주고 있지 않나.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맞지 못했을 날들, 상상하지 못했을 날들을 나는 오늘 하루도 맞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 이재철 목사의 자작시 '바람'을 꺼내 읽었다. 거기에는 '거침 없이 버려본' 이가 노래하는 버림 이후의 영성이 오롯이 흘렀다. 그것은 바람보다 거세고 , 바람보다 깊고, 바람보다 고요한, 그런 바람이었다.
이재철 목사는 "버려야 얻는다.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에만 산골에는 비와 진눈깨비, 그리고 우박이 번갈아가며 내렸다. 송봉근 기자
거창 산골에서 쓴 이재철 목사의 자작시
바람
이재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하고, 로트레아몽은 좌절과 절망을 노래했지 하지만 나는,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바람이 분다 그래서 오늘도 산다 바람, 내 생명의 근원 지혜의 숨결 (2019년 1월 11일)